메리 스크랜톤 여사는 1886년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단 한명의 학생으로 이화학당(이화여자대학교)의 문을 열었다.
미국 매사추세츠 벨처타운에서 1832년 12월 9일 출생하여, 1855년 윌리암 T. 스크랜톤(William T. Scranton)과 결혼하였고, 외아들을 낳았다. 1872년에 남편과 사별하고 1884년 52세의 늦은 나이에 미국 감리회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여성 첫 선교사가 되었다.
아들 윌리암 B. 스크랜톤과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의료선교사로 파송된 희귀한 역사’를 이룩하며 한국에 왔다. 입국 경로는 1885년 2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2월 27일 일본에 도착, 잠시 머물었다가 1885년 6월 20일 내한했다.
1886년 5월 31일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으로 이화학당을 설립했다. 당시 학생은 1명이었다. 김부인이라는 어느 고급관리의 작은댁으로 왕비의 통역관이 되려는 야심을 갖고 입학했으나 석 달을 못 채우고 학교를 떠났다. 그 후 ‘별단이’라는 학생이 입학했다. 1886년 11월에는 한옥 교사(校舍)를 완성하여 이사했다.
1887년에는 학생수가 7명이 되어, 민비는 교육사업의 의의를 인정하고 정부가 승인한다는 의미에서 김윤식을 통하여 “梨花”라는 교명의 편액(扁額)을 하사했다.
학생수가 늘면서 2층의 붉은 벽돌집을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화제가 되었으며 스크랜톤 선교사를 대부인이라 호칭했다. 1908년 5월 31일에는 이화학당 초대 ‘메이 퀸’으로 추대되었다.
이화학당은 표면적으로는 교육기관이었으나 선교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정동제일교회 초대 여성교인은 거의 이화학당 학생이었다. 상동교회에서 전도부인을 대상으로 단기 성경교육을 시작 한 것이 후일 협성신학교로 발전했다.
1903년에는 수원 삼일학교(매향학교)를 설립하므로, 수원, 공주지역의 지방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교회가 설립되었지만 여성들을 교육할 인력과 시설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여성 선교사업을 계획하고 이에 대한 인력을 지원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스크랜톤 대부인은 한국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여성교육에 진력했다. 그의 저서(단행본)로는 《그리스도 셩교문답》《지구 약론》등이 있다.
1909년 10월 8일 새벽 상동 자택에서 77세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사-7)되었다. “한국의 젊은 여성을 위한 사업(교육, 선교)의 선구자중 한사람이었다. 다년간 충실히 봉사하고 그가 선택한 한국에서 많은 좋은 일들의 향기와 기억을 남겼다.”고 에비슨 박사는 추모했다.
비문에는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톤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상동교회와 정동병원을 설립한 윌리암 B. 스크랜톤 선교사(1856-1922)
스크랜톤 대부인의 외아들 윌리암 B. 스크랜톤(Scranton, 施蘭敦)선교사는 1856년 5월 29일 미국 코네티컷 뉴해븐에서 출생하여 예일대학(1878)과 뉴욕 의과대학(1882)을 졸업했다. 루리 W. 암스(Loulie Wyeth. Arms)와 결혼하여, 오하이오주 개업의사로 활동(1882-1884)하다가, 1884년 미국 감리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목사 안수를 받고 1885년 5월 3일 내한했다.
한국에서 왕립병원(제중원)의 봉사를 시작으로, 1885년 9월 10일 최초의 민간병원 ‘정동병원’을 설립하여 독자적으로 의료 활동을 했다. 제중원에 이어 두 번째 병원이었다. 1886년 6월 병원 시설을 확장했으며, 1887년 고종 임금은 “施病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1890년에는 상동병원(현 남대문시장 상동교회 자리)을 설립했다. 그 후 거주지와 활동지를 상동으로 옮겨, 상동교회를 설립했다. 선교부에서는 미국 감리회 조직을 위해 앞장섰고, 회계와 선교부 관리자로 서울 경기 지역의 감리사로 폭 넓게 활동했다. 성서 번역위원으로 위촉되어 성서사업에도 공헌했으며, 로마서 에베소서를 주로 번역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후 1907년 6월 서울에서 열린 ‘감리회선교연회’에서 선교사직을 사임했다. 사임한 뒤에도 귀국하지 않고 독자적 의료 활동에 힘썼다. 만년은 일본에서 보내다가 코베에서 1922년 3월 쓸쓸히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코베 캇가노 묘지에 묻혀있는 것으로 전해지며 아직 양화진에 안장되지는 못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의 모체인 상동교회는 1888년 미 감리교회의 스크랜톤(William B. Scranton) 선교사에 의하여 설립되어 의료사업과 신문화교육을 통하여 선교를 하였고, 일제치하에는 애국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교회 안에 공옥학교와 청년학원을 세워 민족지도자를 양성하였습니다.근세에는 효과적인 선교사역을 하기 위하여 일중·고등학교와 협성대학교를 경영하여 사회교육과 함께 학원선교를 시행하고 있으며,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를 이어주는 복음주의 교회로써 건전한 은혜생활과 구령사업, 말씀중심의 경건한 사회생활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출처: http://kcm.kr/dic_view.php?nid=22483
서울 선한 사마리아인의 길, 윌리엄 스크랜턴길
▲ 아현감리교회 스크랜턴 흉상 ⓒ촬영 이동훈 연구원
대한제국 시절, 당시 권력의 중심이던 경복궁과 덕수궁 주변에는 서구 열강의 지식인들과 외교관들이 모여들었다. 그곳이 바로 정동이다. 현재 정동길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많은 건축물을 비롯한 역사의 현장은 대부분 이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나라 근대 교육이 시작된 곳, 처음으로 신식 결혼식이 거행되었던 곳(정동제일교회에서 1890년 교인이었던 박신실과 강신성의 결혼식), 처음으로 서양 악기가 연주되었던 곳, 처음으로 활자에 기름을 묻혀 책을 박아낸 곳, 처음으로 순한글 신문을 발행하여 근대 언론의 문을 연 곳(독립신문), 처음으로 여성 전용 병원이 설립된 곳(보구여관), 처음으로 국왕이 케이크와 커피를 맛보았던 곳(손탁호텔), 처음으로 ‘파티’라는 연회가 열린 곳 등 훗날 ‘근대화’라 이름 붙여진 사회 변화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정동이다.
또한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곳도 정동이다(《개화와 선교의 요람 정동 이야기》 참고). 정동은 격동하는 역사의 주 무대였기에 그 시대의 역사를 대면할 수 있는 길거리 역사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82년 2월,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어 미국 공사 푸트가 정동 10번지에 공사관을 마련한 이후 덕수궁을 끼고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공사관들이 자리를 잡게 됨으로 정동은 자연스럽게 외국인들의 ‘치외 법권’ 지역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신변을 보호받을 수 있는 정동 주변에 집을 마련하고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정동은 ‘문화의 이방 지역’이 되었다. 치외 법권 지역이라 성역으로 구별되는 곳, 문화의 이방 지역인 정동에서 본격적인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정동에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이름은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정동에 발을 디디고 일본에 있던 그를 정동으로 불러들여 개신교 역사를 시작하게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한국명 시란돈)이다.
의사였던 윌리엄 스크랜턴이 이곳에서 처음 시작한 일은 자기 집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는 일이었다. 후에 고종이 사액현판을 내렸는데 그 이름이 ‘시병원’(施病院)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시병원은 지금의 정동제일교회 문화재예배당 자리에 있었다. 윌리엄 스크랜턴길의 출발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정동 시병원터
▲ Dr 윌리암 스크랜튼 목사와 정동병원(시병원,1885) ⓒ 당당뉴스DB
윌리엄 스크랜턴의 한국 선교는 세계 선교 역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특별하다. 그는 아내와 어린 딸, 그리고 어머니 3대가 함께 선교를 위해 한국으로 건너왔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하셨을 때 주저 없이 길을 떠난 아브라함(창 12:1)과 같은 출발이었다.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은 당시 53세의 고령이었다. 그녀는 아들 선교사를 따라 그냥 길을 나선 것이 아니라 미 감리회해외여선교회(WFMS)로부터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온 한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였다.
1885년 5월 3일 서울에 들어온 윌리엄 스크랜턴은 6월 15일 미국 공사관 건너편에 한옥 기와집을 구하여 이사한 후 9월 10일부터 진료했다. 환자들이 늘어나자 1886년 6월 한옥을 추가로 구입한 뒤 환자들을 받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있는 곳 어디에도 내가 의사라는 것을 알리는 표식이 없습니다. 환자들은 다른 사람들 말을 듣고 찾아오는데 서양 의술에 대한 평판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시설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게 되자 나는 병원 출입문에 간판을 만들어 붙이기로 했지만 어떻게 써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자니 내 어학 선생이 자기에게 맡기라면서 나와 상의도 없이 이렇게 적어 왔습니다. 한문과 한글로 ‘미국인 의사 시약소’(American Doctor’s Dispensary)라 적은 것을 한쪽 기둥에 걸고 다른 기둥에는 경고문처럼 ‘남녀노소 누구든지 어떤 병에 결렸든지 아무 날이나 열 시에 빈 병을 가지고 와서 미국 의사를 만나시오’라고 써 붙였습니다”(“윌리엄 스크랜턴의 연례보고서”, 1886).
▲ 옛 정동교회ⓒ 당당뉴스DB
▲ 현재의 정동교회 ⓒ 당당뉴스DB
정동에서 시작한 병원은 환자들이 몰려들어 환자 수가 처음 1년 동안에는 1,937명, 그 이듬해에는 4,930명에 이르렀다. 같은 의료 선교사였던 알렌(Horace Allen, 한국명 안련)이 고종황제의 특혜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제중원을 세운 것과 달리, 선교사의 순수 투자로 설립된 스크랜턴의 병원에는 돈 없고 가난한 계층들이 몰려들었다.
1886년 “윌리엄 스크랜턴의 연례보고서”(275-276p)를 보면, 이 병원에서 처음으로 치료한 환자는 풍토병에 걸려 서대문 성벽 아래 버려졌던 여인이었다.
“어느 날 오후 도성을 따라 걷고 있을 때 나는 그렇게 버려진 한 엄마와 딸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들은 단지 가마니 한 장은 깔고 또 다른 가마니 한 장을 덮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구걸에 의지했습니다. 남편은 그들을 거기에 버려두고 시골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 그날 밤 아주 큰 추위에 빠졌을 때 나는 막노동꾼을 불러 그 여자에게 다시 가게 되었고 그녀를 병원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 세 주간이 흐른 후 그 여자는 하루가 다르게 건강을 되찾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당신이 기뻐할 만큼이나 밝고 행복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불행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회복되어 가는 것을 보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보람이 있는 일입니다. 그 여자가 앓고 있던 이 질병은 이 계절에 한국에서는 대단히 자주 일어나는 회귀열이란 병으로 아주 무서운 질병 중의 하나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날 밤 들것에 실어 여인을 병원으로 옮긴 짐꾼들의 입을 통해 스크랜턴의 ‘착한 일’은 소문으로 퍼져 나갔다. 죽어 가는 환자를 치료해서 3주 만에 살려냈다는 소문이 나면서 스크랜턴의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이 늘어났다.
조선 시대 기관이나 건물이 국가로부터 가장 확실하게 인증을 받는 방법은 국왕이 이름을 지어 보내는 작명하사였다. 스크랜턴의 병원에 내려진 이름은 ‘시병원’(施病院)이었다. ‘베풀 시(施)’ 자를 붙인 것으로 고종황제와 백성의 희망이 담겨 있었다. 훗날(1901년) 한국 교인들은 스크랜턴의 시병원 사역의 내용과 의미를 이렇게 평가하였다.
“시란돈 장로[스크랜턴]끠…셔 나오시던 해에 대정동에다 병원을 설시하여 대한에 잇는 병든 불상한 사람 보시기를 시작하셧난대 우리나라 대황제 폐하끠…셔 이를 아시고 깃버하사 시 장로사의 대한백성 사랑하심을 치하하신 후에 그 병원 일홈을 시병원이라 하라 하시고 시병원이라 쓴 현판을 사급하시샤 시병원 문압헤 걸게 하시니 시 장로사끠…셔 이래 이 일에 대단히 주의하야 밤낫으로 괴로옴을 생각지 아니하시고 여러 병을 곳치셧시며 죽을 처지에 잇난 사람을 만히 구워하셧나니라. 그 병원에 단이어 병 곳친 사람의 수효는 도합 오만 명가량이 되어슬듯 하더라”(“시란돈 장로사와 그 대부인 귀국하심”, <신학월보>, 1901. 8).
그런데 이때 윌리엄 스크랜턴은 안전하고 편리한 정동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정동은 거주하거나 활동하기에는 편리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찾아오기에는 어려운 곳이었다. 경운궁, 경희궁 등 궁궐이 근처에 있고, 양반 집과 외국 공사관들에 둘러싸인 정동은 귀족들이나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곳이지 가난한 사람이나 격리 치료가 필요한 전염병 환자들은 감히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성문 밖에 버려져 죽어 가고 있었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그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진 것이다.
“한국에서는 집 안에서 운명하지 못하는 것을 대단한 불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인 같은 사람들이 회생 불가능한 병이 들거나 전염병에 걸리면 성 밖으로 추방되어 짚으로 만든 움막 안에서 혼자 살도록 버려지는데 이런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집조차 제공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버림을 받기 때문에 사망률이 더욱 높아진 것으로 확신합니다. 한국에는 이런 환자들을 돌볼 만한 자선기관이 거의 없는 형편이라 환자들이 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서울 성문 밖 어느 곳을 가 보던지 언제나 이처럼 버려진 환자들을 수백 명씩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이처럼 전염병이 창궐한 특별한 지역에 집 한 채를 마련해서 이런 환자들을 위한 수용 시설로 꾸며 치료와 함께 필요한 땔감과 음식을 제공하고자 합니다”(윌리엄 스크랜턴이 레이드 박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887).
윌리엄 스크랜턴은 성문 밖으로 눈을 돌려 그곳으로 병원을 옮길 계획을 세웠고, 그 병원을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이라 했다.
“그것이 나에게는 참된 의료선교 사역의 극치에 놓인 일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병으로 괴로워하는 그들을 돌보아 주어야 하며 그러한 친절한 섬김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에게 명령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많은 생명들을 구해야 하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결과적으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잃어버리는 것입니까? 나는 그러한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을 시작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윌리엄 스크랜턴이 레이드 박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887. 8. 13).
결국 본부의 승인 아래 스크랜턴은 1888년 12월에 애오개 시약소, 1890년 10월에 남대문 시약소, 1892년 동대문 시약소를 열었다. 이렇게 정동에 있던 시병원은 ‘여리고 골짜기’ 같은 곳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병원이 떠난 자리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 예배당인 지금의 문화재예배당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아펜젤러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1858년 2월 6일 펜실베이니아 소더톤에서 독실한 신자이셨던 부모님 아래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아펜젤러는 메노나이트 출신의 어머니의 경건한 신앙심과 복음주의 신앙의 가정환경에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은 물론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까지 줄줄 암송할 만큼 대단한 신앙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872년 임마누엘 개혁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전형적인 장로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펜젤러의 인생을 전환시킨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무려 3년 동안이나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옮기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다가 마침내 감리교로 이적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이 일은 아펜젤러가 18세의 나이에 뚜렷한 회심을 경험하고 나서, 그의 신앙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끄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제 선교사로서의 길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1882년 무수한 인재를 배출한, 랭카스터의 개혁교회가 운영했던 프랭클린 마샬 대학을 졸업하고, 동부의 명문 드루신학교에서 신학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1883년 그가 신학교 2학년 재학 중에 참석하게 되었던 '신학교 연맹대회'는 그의 가슴을 선교에 대한 비전으로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대회를 통해 장차 한국 선교의 열렬한 동반자가 되는 언더우드와의 만남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펜젤러가 원래 선교사로 지망했던 곳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선교를 지망했던 친구 워즈워드가 어머니의 중병으로 한국행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언더우드의 만남을 통하여 한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한국 선교를 향한 결단을 내리고 역사적인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188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북감리교 파울러 감독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아펜젤러는 곧장 한국을 향해 떠났습니다. 갓 결혼한 사랑하는 아내와 스트랜톤 선교사 가족과 함께 출항하여 2월 27일 일본의 요코하마 항에 먼저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아펜젤러 일행은 맥클레이 선교사 자택에서 열린 '제1회 한국선교사회의'에 참석하게 됩니다. 바로 이 회의가 감리교 한국선교회에 정식으로 조직됨으로써 향후 한국선교의 장을 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에 머무는 동안 아펜젤러는 틈나는 대로 한국어를 습득하고, 한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한국선교를 위한 준비를 꾸준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한국 땅을 향해 배를 타고 떠났으며, 1885년 4월 5일 부활 주일 오후 3시에 제물포항에 도착했습니다.
배재학당을 세우고 민주주의와 독립정신을 키우다
아펜젤러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선교지를 밟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갑신정변으로 인해 혼란에 휩싸였던 한국 땅에서 미국 공사 폴크는 아펜젤러 부부에게 일본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선교지에 첫 발을 내딛은 감격이 가시기도 전에, 아펜젤러 부부는 일주일 만에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는 일본에 2개월 동안을 머물며 기회를 엿보다가 국내정치가 안정된 6월 16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막힌 줄만 알았던 한국선교의 문은 그때부터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아펜젤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일환으로 한국에서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시작한 학교는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유능한 인재를 기르는 학교)이라는 학교명을 하사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선교 사역은 언더우드 선교사와 더불어 눈부신 열매와 업적들을 한국 땅에 남기게 되었습니다. 정동에 자리잡은 아펜젤러 선교사는 8월 3일 두 학생과 함께 영어 학교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고 나중에는 학교 설립과 신학교육, 연합선교, 성경번역 그리고 문서 선교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사역을 이루게 합니다. 그 중에서도 정동제일감리교회와 배재학당의 설립 그리고 한글성경의 번역은 그가 남긴 가장 값진 유산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배재학당에는 점차로 복음의 능력이 퍼져서 많은 학생들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의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라는 토론회를 조직하고 독립협회의 서재필, 윤치호 등을 강사로 초청해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습니다. 그는 복음의 능력이 개인의 구원에 국한되지 않고 고난 당하는 민족을 위해서 봉사하는 데 까지 확장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한국 감리교의 초석을 놓다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교의 초석을 놓은 선교사이기도 합니다. 1887년 10월 아펜젤러는 벧엘이라고 이름 지어진 집에서 감리교 최초의 공중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1897년 12월 26일 성탄 주일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벧엘 예배당의 헌당식을 드렸습니다. 이 때 아펜젤러는 10년 전 벧엘에서의 첫 설교를 반복하였습니다. "나는 성탄절날, 10년 전인 1887년 성탄절에 한국에서 감리교 목사로서 처음 시도한 공식 설교를 되풀이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가로 8자 세로 12자의 한 조그마한 방에서 예배했지만, 지금부터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성별하여 바치려는 이 아름다운 성전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나라에서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판분야에 공헌, 최초의 한글 성경번역위원회를 조직하다
그는 출판 분야에서도 두드러진 공헌을 하였습니다. 배재학당 안에 삼문출판사라는 인쇄소를 만들고, 기독교 소책자들과 <독립신문>등 일반신문을 인쇄하였습니다. 또한 아펜젤러는 언더우드, 스크랜턴과 더불어 성경번역위원회를 최초로 조직해서 한글성경번역에도 상당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활동으로 한국을 섬기던 아펜젤러는,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던 중 배가 침몰하면서 순직하였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 44살이었습니다. 한국에 27살 때 들어왔으니 17년 동안 선교사로 일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과 함께 동승했던 한국인 비서와 어린 한국 소녀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자기 목숨은 돌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한국인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고 떠난 선교사였습니다. 이렇게 한국에서의 17년의 세월을 불꽃같이 살다가 떠났지만, 그의 선교의 열매들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이 땅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한국사랑
아펜젤러의 자녀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에서 일평생 교육선교사로 헌신하였습니다. 아들 아펜젤러 2세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배재학당의 교장과 이사장으로 일하였으며,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도 이화학당장을 맡아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시키고 초대 교장이 되어 섬겼습니다.
double main(void) { int opt; double num1, num2, result;
TITLE();
while(1) { opt=CHOICE(); num1=INPUT(); num2=INPUT(); switch(opt) { case 1: result=ADD(num1,num2); break; case 2: result=SUB(num1,num2); break; case 3: result=MUL(num1,num2); break; case 4: result=DIV(num1,num2); break; default: printf(" Let's do it again\n"); break;
} OUTPUT(result); }
return 0; }
break;을 안쓰고 실행해 봤더니, 오류도 없이 실행이 잘 되나 싶었는데,
글쎄!!! 이상하고 엉뚱깽뚱한 답이 나오는게 아닌가?
다시 침착하게 코드를 쭉 읽어봤다.
break;을 모두 쓰니 완벽하게 계산기로 만들어졌다.
내용도 길고,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창을 꺼버리게 만드는 내용일 수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