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eam 일정]


 07:00 

 기상 

 07:00 - 08:30

 아침식사 및 출발 준비 

 08:30 - 10:00

 시청역 12번 출구

 10:00 - 10:50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10:50 - 11:50

 덕수궁 관람

 11:50 - 12:20

 서울 성공회 성당 관람

 12:20 - 13:50

 점심식사 (식당명: 깡장집)

 14:00 - 14:30

 정동제일교회 

 14:30 - 15:00

 합정역 이동

 15:00 - 16:20

 양화진 선교사 묘원 

 16:20 - 18:00

 다과회 ( BLANC DE TEA )

 18:00 - 18:30

 신도림역 집결

 18:30 - 19:30

 동인천 도착 

 19:30 - 21:00

 저녁식사 ( 한울타리 닭갈비 )

및 수련회 피드백 작성

 21:00

 해산




[읽을거리]

아펜젤러.jpg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년 2월 6일 ~ 1902년 6월 11일)는 1885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한 미국 감리교(북감리회) 선교사입니다. 그는 선교사가 설립한 최초의 근대사학인 배재학당(현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을(를) 세운 설립자이며, 구한말 한반도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자녀들인 아들 헨리 다지 아펜젤러는 미국에서 공부한 뒤 아버지를 이어 배재학당에 교장으로 취임해 학생들의 교육에 헌신했고,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 역시 이화학당(현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을 발전시키는 데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아펜젤러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1858년 2월 6일 펜실베이니아 소더톤에서 독실한 신자이셨던 부모님 아래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아펜젤러는 메노나이트 출신의 어머니의 경건한 신앙심과 복음주의 신앙의 가정환경에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은 물론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까지 줄줄 암송할 만큼 대단한 신앙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872년 임마누엘 개혁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전형적인 장로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펜젤러의 인생을 전환시킨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무려 3년 동안이나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옮기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다가 마침내 감리교로 이적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이 일은 아펜젤러가 18세의 나이에 뚜렷한 회심을 경험하고 나서, 그의 신앙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끄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제 선교사로서의 길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1882년 무수한 인재를 배출한, 랭카스터의 개혁교회가 운영했던 프랭클린 마샬 대학을 졸업하고, 동부의 명문 드루신학교에서 신학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1883년 그가 신학교 2학년 재학 중에 참석하게 되었던 '신학교 연맹대회'는 그의 가슴을 선교에 대한 비전으로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대회를 통해 장차 한국 선교의 열렬한 동반자가 되는 언더우드와의 만남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펜젤러가 원래 선교사로 지망했던 곳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선교를 지망했던 친구 워즈워드가 어머니의 중병으로 한국행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언더우드의 만남을 통하여 한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한국 선교를 향한 결단을 내리고 역사적인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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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북감리교 파울러 감독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아펜젤러는 곧장 한국을 향해 떠났습니다. 갓 결혼한 사랑하는 아내와 스트랜톤 선교사 가족과 함께 출항하여 2월 27일 일본의 요코하마 항에 먼저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아펜젤러 일행은 맥클레이 선교사 자택에서 열린 '제1회 한국선교사회의'에 참석하게 됩니다. 바로 이 회의가 감리교 한국선교회에 정식으로 조직됨으로써 향후 한국선교의 장을 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에 머무는 동안 아펜젤러는 틈나는 대로 한국어를 습득하고, 한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한국선교를 위한 준비를 꾸준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한국 땅을 향해 배를 타고 떠났으며, 1885년 4월 5일 부활 주일 오후 3시에 제물포항에 도착했습니다.



배재학당을 세우고 민주주의와 독립정신을 키우다 

아펜젤러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선교지를 밟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갑신정변으로 인해 혼란에 휩싸였던 한국 땅에서 미국 공사 폴크는 아펜젤러 부부에게 일본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선교지에 첫 발을 내딛은 감격이 가시기도 전에, 아펜젤러 부부는 일주일 만에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는 일본에 2개월 동안을 머물며 기회를 엿보다가 국내정치가 안정된 6월 16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막힌 줄만 알았던 한국선교의 문은 그때부터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아펜젤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일환으로 한국에서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시작한 학교는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유능한 인재를 기르는 학교)이라는 학교명을 하사 받았습니다. 


배재학당.gif 


그때부터 그의 선교 사역은 언더우드 선교사와 더불어 눈부신 열매와 업적들을 한국 땅에 남기게 되었습니다. 정동에 자리잡은 아펜젤러 선교사는 8월 3일 두 학생과 함께 영어 학교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고 나중에는 학교 설립과 신학교육, 연합선교, 성경번역 그리고 문서 선교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사역을 이루게 합니다. 그 중에서도 정동제일감리교회와 배재학당의 설립 그리고 한글성경의 번역은 그가 남긴 가장 값진 유산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배재학당에는 점차로 복음의 능력이 퍼져서 많은 학생들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의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라는 토론회를 조직하고 독립협회의 서재필, 윤치호 등을 강사로 초청해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습니다. 그는 복음의 능력이 개인의 구원에 국한되지 않고 고난 당하는 민족을 위해서 봉사하는 데 까지 확장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한국 감리교의 초석을 놓다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교의 초석을 놓은 선교사이기도 합니다.
1887년 10월 아펜젤러는 벧엘이라고 이름 지어진 집에서 감리교 최초의 공중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1897년 12월 26일 성탄 주일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벧엘 예배당의 헌당식을 드렸습니다. 이 때 아펜젤러는 10년 전 벧엘에서의 첫 설교를 반복하였습니다. "나는 성탄절날, 10년 전인 1887년 성탄절에 한국에서 감리교 목사로서 처음 시도한 공식 설교를 되풀이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가로 8자 세로 12자의 한 조그마한 방에서 예배했지만, 지금부터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성별하여 바치려는 이 아름다운 성전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나라에서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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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분야에 공헌, 최초의 한글 성경번역위원회를 조직하다 

그는 출판 분야에서도 두드러진 공헌을 하였습니다. 
배재학당 안에 삼문출판사라는 인쇄소를 만들고, 기독교 소책자들과 <독립신문>등 일반신문을 인쇄하였습니다. 
또한 아펜젤러는 언더우드, 스크랜턴과 더불어 성경번역위원회를 최초로 조직해서 한글성경번역에도 상당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활동으로 한국을 섬기던 아펜젤러는,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던 중 배가 침몰하면서 순직하였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 44살이었습니다. 한국에 27살 때 들어왔으니 17년 동안 선교사로 일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과 함께 동승했던 한국인 비서와 어린 한국 소녀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자기 목숨은 돌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한국인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고 떠난 선교사였습니다. 이렇게 한국에서의 17년의 세월을 불꽃같이 살다가 떠났지만, 그의 선교의 열매들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이 땅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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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뒤를 이은 한국사랑 

아펜젤러의 자녀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에서 일평생 교육선교사로 헌신하였습니다. 아들 아펜젤러 2세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배재학당의 교장과 이사장으로 일하였으며,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도 이화학당장을 맡아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시키고 초대 교장이 되어 섬겼습니다.


아펜젤러2세.gif  


출처: http://www.kimpoms.org/mission/34758

https://ko.wikipedia.org/wiki/%ED%97%A8%EB%A6%AC_%EC%95%84%ED%8E%9C%EC%A0%A4%EB%9F%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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